다시 일어나니 세상은 다 재로 뒤덮여 있지
/ NIve - I'm alive
비파는 초점 없는 멍한 눈동자로 허공을 훑는 일이 잦았다. 시선의 궤도가 때로는 직선을, 또 곡선을 그리다가도 너의 호명에 금세 또랑또랑한 눈으로 물었을 것이다. 왜 불러? 특유의 파핫! 하는 웃음은 덤. 그 순박한 태에 K는 종종 핀잔을 주고는 했다, 넌 진짜 속도 없냐, 하고. 속도 없는 비파는 그 말에 또 웃었다. 그럼 좋은 거 아닌가. 답도 없는 이 대화에서 K는 매번 패자였다. 혀를 내두르며 끝맺는다, 미친 새끼. (파앗) 고마워. 에휴, X발. 말을 말자.
누군가의 경험을 통해 득을 볼 줄도 아세요 그게 피차 좋다는 걸 왜 몰라줄까
/ AKMU - 째깍 째깍 째깍
이타적이라는 말만으로는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을 유순함이 두드러진다. 예정된 손해에도 아랑곳않고 행하는 친절은 가끔 광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꼭 잘 짜여진 프로그램 같았으니까, 비파는. 혹은 잘 길들여진 곡예용 코끼리, 조잡하게 꿰매어진 배를 누르면 같은 말만을 내뱉는 싸구려 인형이었을까. 적지 않은 사람, 아니, 망자들이 비파의 천성을 영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대도 그를 곁에 두었던 데에는 분명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K, K의 경우에는 이해 불능이 그 이유로 작용했다더라.
비파를 친구의 친구로 건너건너 알고 지내던 시절의 K: [ 저 새끼는 왜 저러고 살지? ]
K의 상식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비파에게 궂은 말을 하고 틱틱대고 너 그렇게 살다간 사기 당한다는둥 남이 보면 쟤 비파에게 관심 있나…… 싶을 정도로 챙기다 보니 소위 말하는 짱친에 속하게 된 지금의 K: [ 이 새끼는 왜 이러고 살지? ]
그래, 비파는 대개 상술한 문장에서 그 '새끼'에 속한다. 거슬릴 정도로 선하다는 건 결국 타인의 신경이 쓰이도록 만든다는 뜻이기도 했으며, 그 새끼, 비파는 그런 류의 관심 한가운데 있기에 적합할 뿐이다.
過ぎ去ってしまった記憶を切り裂いて 지나가버린 기억을 찢어버리고
/ DUSTCELL - Mad Hatter
세상에 신이 있을까, 귀鬼신은 지겹도록 보고 있는데. 비파는 생전에 종교를 가져 본 기억이 없었다. 사실 기억이 온전한 것은 아니지만, 죽음을 맞은 뒤 영에 당도한 직후의 비파가 하나님 정녕 이곳이 천국인가요, 내지는 오, 신이시여! 따위의 추임새를 내뱉지 않았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신을 믿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오히려 이제 와 신이 나타난다면 그것이야말로 불행의 전조일 거라고 비파는 생각했다. / 요컨대 신은 전지전능하기 마련인데, 세계의 모든 사건을 알고 있으며 또한 그 모든 사건의 결과를 예견된 것보다 더 나은 쪽으로 실현시킬 만한 능력이 있음에도 그러지 않는 것은 불행하게도 신적인 존재가 선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냐고 / 그러니 차라리 전지전능한 해악 따위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편이 훨씬 이로울 것이라고.
아 이 새끼 또 시작이네. 하여간에 안 어울리게 회의적으로 굴기는. 투덜거리면서도 기어코 비파의 공상을 끝까지 경청한 K가 딴지를 걸었다. 그럼 햅데이는 뭔데. 신이 없으면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어떻게 되살릴 수 있는 건데? 이때 비파는 특유의 멍하면서도 산뜻한, 해맑고도 멍청한 낯으로 답했다. 자 연 의 신 비. 종종 비파는 짓궂으리만치 멍청하게 구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꼭……
輪郭も忘れてただ踊ってふらついたままで 윤곽도 잊고서 춤을 춰 휘청거리는 채로
/ DUSTCELL - Mad Hatter
무지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처럼, 무능하고자 애를 쓰는 망자처럼. 천칭을 든 채 안대를 쓴 디케는 정의를 지키려 스스로 무지를 택했으니. 물론 비파의 의견은 달랐다, 택한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빡대가리인 거야, 말끔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으니까. 뭐 햅데이 결승까지 이르게 된 데에는 단순히 운만이 적용하지는 않았을 터, 오히려 유능한 축에 속할지도 모르지만…… 비파는 제 능력을 내세우는 것을 유독 꺼렸으니, 확신할 방도야 없겠다.
또 하나, 비파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이미 희미해진 기억을 손에 쥐어 봤자 모래알처럼 흘러내릴 뿐이었으니, 차라리 알고 싶어하는 마음까지도 접어두는 게 이롭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 영에서 지내게 된 지 일주일째의 일이었다. 천성이 순해 이승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던 여러 미련들은 이제 희뿌연 안개와 같고, 비파는 마지막 기로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보기로 한 것뿐이다. 그래야 인정받을 수 있을 테니까, ……누구에게? 비파는 형태를 잃은 기억에 연연하지 않는다.
망가져도 다시 일어서야 하니까 그렇지 못하는 소모품은 되고 싶지 않으니까
/ ALEPH - 맞불
특기는 바이올린 연주, 취미는 클래식 감상. 배웠던 기억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으나 몸(으로 여겨지는 혼의 형체)이 기억하고 있는지, 영에서의 비파도 바이올린을 꽤나 잘 켰다. 비파가 더 오래 살 수 있었다면 저명한 연주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미 지나가버린 가능성을 붙잡는 것만큼 시간 아까운 일이 없겠지만.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바이올린, 그리고 □□□ 칭찬과 신뢰. 미각을 잃은 현재에 이르러서는 아무 쓸모도 없게 된 단맛의 음식. (그마저도 이젠 단맛을 좋아했던 기억까지 잃어 좋아하는 것 축에 들 수가 없겠다.) 그리고 싫어하는 것은 딱히 없음. 있어도 드러내는 일이 없음, 그러니까 없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지기 전에 불씨 하나는 지펴 놓아야만 해 영원히 꺼지지 않도록 뜨겁게
/ ALEPH - 맞불
이름 이해신, 나이 열일곱, 키가 정확히 몇이더라…… 와, 벌써 까먹었나 봐.
(중략)
나는 죽었다. 그건 내가 영에 속하게 되기 직전, 나를 데리러 온 이를 마주하자마자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나이에 비해 앳되었으나 곳곳에 나이테처럼 세월이 밴 중년의 여성은 아주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꿈에서도 불가능한 일이 내게 현실로 다가왔는데, 나는 걸음을 떼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설령 그 끝이 나의 사지가 된다고 해도.
옅지만 분명한 이명과 함께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웃는 얼굴은 낯설었으나, 어쩐지 뒷모습은 지독하게 낯익은 사람. 저승사자는 사랑했던 이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던데, 그럼 역시 나는 모호한 기억 속에 분명히 자리잡고 있을 이 사람을 사랑했던 걸까. 그렇다면 나는 정말 지독한 외사랑을 해 왔을 거야, 틀림없어. 꼬리를 물고 흘러가는 생각을 쥐어채 끊어냈다. 떠오르지도 않을 기억을 갈구해 봤자 답답한 건 나니까, 의문은 불태워두고 지금 당장을 살아가겠다고. 아, 이미 죽었지 참.
비파의 회고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후세계] 中
'좋아하는 것을 적으시오: (생략) 다 좋아함.' 뭐야, 데이. 역시 나를 미워하는 건 다 연기였던 거지?
응, 그건 아니야.
무지와 무능과 위선과 약자 기타 등등…… 답답한 구석이란 구석은 죄다 자처해버린 비파가 데이의 이해 범위 내에 있을 리 없었다. 퍼즐 조각도 반대되는 모양이라야 들어맞고, 톱니바퀴 한 쌍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회전해야만 매끄럽게 굴러가는 것처럼, 다른 점만 닮은 비파와 데이는 없으면 안 되는 친구까지는 아니어도 없으면 조금 아쉬울 사이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사실은, 햅데이 시즌 10의 해설자로 데이가 내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비파의 반응은 손에 꼽힐 정도로 담백했다. 데이가 요새, 많이 심심했나 보네. 우리의 우정은 이다지도 얄팍하고 또 견고하다.
1.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내가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은,
① 가족 혹은 친구/지인을 만나는 것이다.
②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적응하는 것이다.
③ 아무것도 없다.
④ 없지는 않으나 순위를 매길 정도의 생각은 없다.
⑤ 기타 (한 문장 내로 기재): 내가 사랑했던 사람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해드리는 것, 그리고 인정받는 것
2. 당신이 우선시 하는 가치는?
① 돈
② 명예
③ 권력
④ 생명
⑤ 딱히 없다/기타 (한 문장 내로 기재): 음악 (큰 미련은 없으나 개중에서는 가장 우선인 연유로)
3. (상대는 이미 죽은 상태이며, 아픔을 못 느낀다고 해도) 사람을 공격하는 것에 나는,
① 죄책감 같은 것을 느낀 적이 있다.
② 죄책감 같은 것을 느낀 적이 없다.
③ 느꼈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잘 모르겠다.
4. 우승한다면 살아날 기회를 본인이 사용할 것인가?
① 그렇다
② 아니다
③ 잘 모르겠다
5. 다음 키워드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① 드라마
② 그림자
③ 해
④ 외면
⑤ 축제
아마 네게 있어 나만이 행할 수 있는 호의 같은 건 없겠지만
리타에 대해 들은 바가 없지는 않았다. 기껏 이승에서의 제약에 구애받지 않는 영에까지 와서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건 확실히 주목받기 좋은 성향이었으니까. 리타에게 머무는 A가 어떤 행색이었다느니, 그것을 묵인하는 리타는 또 어떤 사람일 것이라느니 하는 것들, 그렇대도 비파는 여전하게 무지했다. 비파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바깥의 리타뿐이었으니까. 리타는 종종 비파에게 말을 붙여 왔는데, 대개는 상점에서 물건을 사다 달라거나, 두고 온 제 물건을 좀 가져와 달라는 것처럼 비파의 오지랖 내지는 호의의 범주 내에서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부탁들 / 하나같이 비파가 나서서 거절할 리 없는 것들이었다.
또, 리타는 비파에게 바이올린을 연주해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리타의 물음은 종종 권유처럼 느껴져서, 이상하게도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쉽게 들지 않았다. 참 능숙한 사람이구나, 리타는. 그렇게 생각하며 비파는 선율을 씹었다. https://youtu.be/cuWNXezINX0 그건 비파가 두 번째로 아끼는 곡이었다.